이정원
등록일 2020-02-26 / 조회수 1067
이스라엘 성지순례 여리고 <시험산> 여리고에는 수많은 유적지가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8천 년부터 이곳에 인류가 살았었다고 하니 만년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여리고 정탐꾼을 살린 사람이 '기생' 라합이라면 그때도 교통의 요충지로서 물산이 풍요롭고 향락산업이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요단강 세례터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는 사실도 세례요한과 그 다음 예수님도 이 향락의 도성에서 새로움을 (회개) 우선적으로 설파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시험산 조망대> 첫번째 들른 곳은 시험산 전망대다. 시험산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배가 주리셨을 때 광야의 돌덩이로 유혹을 하고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의 도성으로도 유혹을 하고 마지막으로 발아래 펼쳐진 풍요의 도성 여리고로 유혹을 했음에도 우리 주님은 단호하게 물리치고 오히려 마귀를 꼼짝 못하게하는 말씀과 논리로 반박을 하셨던 것이다
이정원
등록일 2020-02-25 / 조회수 1212
<여리고 Jericho> (月)의 성읍’, ‘종려나무의 성읍’, ‘향기의 성(城)’이란 뜻. 요단 강 서쪽으로 약 8㎞, 사해 북쪽으로 약 11㎞, 예루살렘 북동쪽으로 약 23㎞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최고(最古)의 성읍 요단강 동쪽에서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땅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자, 요단 강 서쪽의 넓고 비옥한 평원을 지키기 위한 경제·전략적 가치 때문에 B.C. 7천 년경에 이미 이곳에 성읍이 세워졌다고 한다. 성경에 언급된 여리고 종려나무가 많아 ‘종려의 성읍’이라 일컬어지는 이곳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대상지였다. 이스라엘은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이곳을 이적적인 방법으로 탈취했다(수 6:1-25). 한편 이곳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엘리야와 엘리사가 방문한 적이 있으며(왕하 2:4-22), 이스라엘 자손이 선지자 오뎃의 권면으로 이곳에서 유다 포로를 석방하기도 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침공했을 때 예루살렘 성을 탈출해 나온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곳에서 사로잡혔다. 또한 바벨론 포로 귀환 때는 이곳 출신자들이 돌아와 성벽을 재건하기도 했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께서 여리고 성을 지나시다가 맹인 바디매오의 눈을 치료해주셨고(마 20:29-34), 세리장 삭개오를 만나기도 하셨으며(눅 19:1-2),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배경으로 이곳을 언급하기도 하셨다(눅 10:30, 33).
이정원
등록일 2020-02-25 / 조회수 1275
<맛사다 Masada > 맛사다는 유태인 역사 속에서 가장 극적인 스토리를 보여주는 곳이다 사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맛사다는 기원전 37년 유대의 헤롯 대왕이 지은 요새화된 궁전이다. 헤롯이 죽은 이후 로마 주둔군이 맛사다를 차지했으나, 이곳은 로마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AD 66년에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 열심당원의 피난처가 되었다. AD73년 유태인 반란 최후의 보루인 맛사다를 점령하기 위해 로마 제10군단이 파견되었으며 그 결과 900명 이상의 열심당원들이 죽었다. 이들은 항복을 앞두고 집단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오늘날 맛사다 유적은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정원
등록일 2020-02-25 / 조회수 1134
이스라엘 성지순례 #7-1 다시 이스라엘로 요르단에서의 2박 3일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날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했다. 암만은 해발 800 미터가 넘는 높은 산지인데 순식간에 해발 마이너스 400 미터에 가까운 모입평지로 1,000 미터 이상의 고도차를 단시간에 내려오니 기압차를 느낀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나라의 격차도 한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느낀다. '억울하면 출세를 하라'는 유행가도 있기는 하지만 국경에서의 이스라엘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 같다. 오늘의 일정은 알렌비 국경을 통과해서 요단강 세례터를 보고 사해 해변길을 따라 최후의 항전지 맛사다에 내려갔다가 다시 여리고로 올라오는 일정이다.
이정원
등록일 2020-02-21 / 조회수 977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한 후 생활하였다.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BC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도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또한 이곳은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BC 7세기 무렵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나바테 문명이 세워졌다. 106년에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땅을 빼앗겼다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2년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잊혀진 페트라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가 유럽에 알려졌다.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으며,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